2013. 1. 7. ~ 2013. 3. 1.
#8. 우연히 머물다, 자이뿌르(2013. 1. 21. ~ 1. 22.)
자이뿌르, 인도
인도에서 타는 첫번째 로컬버스는 아니었다. 델리의 붉은 성에서 빠하르간지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했기 때문. 그래도 그 때는 조금 길을 알 법했는데 이번에는 도로도 오락가락했고 버스도 조금 불편했다. 버스를 타고 내가 알지 못하는 길을 지나며 옆자리 앉은 다른 사람과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일상은 느즈막한 오후 버스가 자이뿌르에 도착할 때야 비로소 깨졌다. 자이뿌르는 애초에 올 생각도 없었으나 갑작스레 방문하게 된 곳이라 숙소 정보가 하나도 없었고 여기서 뭘 해야하는지도 몰랐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다보니 코쿤 게스트하우스가 괜찮다고 하기에 거기에 묵으려고 했더니 방이 꽉 찬 상태였다. 다행히도 더블 방을 혼자 쓰던 한국 남자분께 양해를 구해서 세를 들어갈 수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도시의 어둠은 낯설었다. 전기의 수급이 어렵던 바라나시와 원래 어두운 분디. 자이뿌르는 확실히 이 두 개의 도시보다 밝았다. 코쿤 게스트하우스의 장점은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저렴한 비용과 깔끔함이었지만 그 중에는 위치적 장점에도 있었다. 관광지와 교통수단의 중간 지점에서 동선을 효율적으로 짤 수 있었다. 또한 조금만 걸어가면 자이뿌르의 명물 라씨왈라와 밥집들이 산재하여 끼니를 해결하는데에도 불편함이 없었다. 시험삼아 자이뿌르 역까지 걸어가서 분디에서 델리로 가는 표를 취소하고 자이뿌르에서 자이살메르로 가는 표를 예약했다.
다음 날의 일상은 단촐했다. 체크아웃을 해야 했기에 아침에 라씨 한 잔을 곁들여 즐기곤 짐을 아저씨에게 맡겼다. 그리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숙소에 묵고 있는 한국 분들과 ‘나름’ 프렌즈에 나온 맛집을 찾아 표독스럽게 끼니를 갈망했다. 다른 사람들은 여행지로 바로 향했지만 나는 자이뿌르의 거대한 시장과 그 골목 속으로 나를 이끌었다.
해가 머리 위에 떠오른 정오, 자이뿌르의 옛 도시 핑크 시티를 거닌다. 정신없이 오가는 사람들은 배가 조금 더 고파지기 전에 사야할 물건을 찾아 두리번거렸고 시장의 상인들은 지금 식사를 먹어야할지 혹시 저 손님이 자신의 가게에 들어오지 않을 지 노심초사다. 좌판에서는 음식을 튀기고 볶는 소리가 맛있게 들려오고 식당은 어느 새 음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수다 소리로 가득 찼다. 햇살로 찬란하게 빛나던 수려한 도시도 슬슬 식사를 준비한다. 인적이 끊긴 시장거리에는 뒤늦은 점심 도시락을 꺼내든 상인의 식사가 한창이었고 이미 식사를 끝낸 사람은 짜이를 한 잔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고 있다. 한적한 느낌이 드는 시장 풍경. 낙타몰이꾼은 뭐가 이리도 급한지 밥 시간도 잊고 낙타를 이리저리 몰았고 하교하는 학생들은 시장을 둘러보며 집으로 돌아갔다. 다채로운 색깔의 제품이 길가는 이를 유혹하고 향기가 그윽한 거리는 지갑을 열라고 독촉한다. 이 얼마나 평화로운, 인간다운 정경인가?
자이뿌르의 핑크 시티에는 염료를 파는 사람들과 향신료를 파는 사람들로 색채가 마비되고 있었다. 진한 원색은 눈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애써 돌린 곳엔 해만 요란하게 번쩍인다.

시장 바닥에서 일어나 낮이 무성해진 거리로 나왔다. 배를 든든히 채운 사람들은 한결 느려진 걸음으로 시장을 걷고 상인들조차 소박하지만 푸짐했던 오늘 점심을 그리워하며 느긋하게 오후 장사를 시작한다. 짜이를 한 잔 하면서 햇빛을 즐기는 할아버지는 만족스러운 듯 자신의 성난 수염을 부드럽게 매만졌고 점심이 부족한 사람들로 간식을 파는 청년의 손이 분주하다. 골목 안에선 아이들과 어른들이 끼리끼리 모여있고 옥상에는 할 일이 없는 자들의 몽상으로 가득하다.




방향을 바꿔 잔타르만타르에서 시간을 죽일까하여 방문했다. 입장료는 200루피, 적지 않은 돈이기에 오래 머물러야겠다는 마음을 단단히 먹는다. 암베르 성을 가볼까 하는 생각도 사뭇 들었지만 갔다왔다하여 기차를 타러가기에 시간은 촉박했다. 시간에 쫓기는 느낌이 바라나시 이후로 싫어졌기 때문에 이 곳에 여유로이 머문다.

잔타르만타르로 들어서자 오후의 강한 햇빛을 피해 그늘로 숨은 여행객과 가이드의 설명이 공허히 울려퍼진다. 거대한 해시계는 자신의 역할을 다하여 시각을 나타내고 전시물 위에서 사진을 남기려는 관광객과 이를 저지하는 경비의 호각 소리가 매섭다. 벽을 보수하는 인부와 여행객의 사이에 놓인 벤치에는 뽀얗게 먼지가 쌓이고 풀밭에 드러누운 아이는 어머니의 근처에서 잠을 청한다.
자이뿌르는 나에게 있어 우연한 만남과도 다름없다. 내게 이 곳이 우연한 만남이듯 이 곳과 이 곳의 사람들에게도 내가 우연한 만남이겠지.




숙소로 짐을 찾으러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 번 라씨왈라를 들렀다. 바라나시에서 매일 같이 시원라씨 집을 찾던 나였지만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그 이상의 맛을 뽐내는 자이뿌르의 라씨왈라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인도 여행 덕분에 스트레스에 점철된 지금 나의 장은 여전히 건강한 것인지도 모른다.

숙소로 돌아오니 사장님이 망가진 컴퓨터를 고쳐보고 있다. 한참 거들다 멀리 나가기 싫어 테라스에서 저녁을 주문한다. 국수 가락을 넘기며 핑크 시티가 핑크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자이뿌르와 작별을 해야한다는 마냥, 어서 밥을 먹고 이 곳을 떠나라는 마냥. 우연히 만났다고 했지만 서로를 제대로 알기 전에 떠나보내었다. 가볍게 떠나보낸 상대를 그리워하는 것은 실례일 수도 있으나 일정 없이 서성이며 들이킨 라씨 한 잔이 그리워지는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