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외국 학생들과 전방에 있는 땅굴을 돌아다닐 때 함께 했던 룸메이트와 밀짚모자를 산 적이 있다. 그 모자를 눈독 들이던 대만 여학생에게 친구는 모자를 강탈 당했지만 나는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이번 여행에 데려왔다. 일전에 학생들을 서포팅하고 있을 때 이 모자가 어떤 모자인지 물어본 적이 있다. 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먼 산을 보며 최근 잇다른 FTA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우리 농민을 기리기 위해 평소에도 밀짚모자를 쓰고 다닌다고 했고 대만 친구들은 그 말에 괜히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조금 더 친해진 뒤에 거짓말임을 알려주긴 했지만 이 모자를 쓰고 다니면 항상 신기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다 근처에 있는 섬은 여름이라도 시원할 것이라 생각한 나의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갔고 내리쬐는 태양 속에서 나의 목숨을 지켜주는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여행을 갈 때면 셀카보단 그림자를 찍는다. 화가들이 자신의 모습을 그렸고 사진작가들이 자신의 모습을 촬영했지만 나에게 있어서 자화상은 이 그림자다. 평상시에 내가 짓고 다니는 표정은 내 생각에 무표정이지만 남들은 내가 화가 났다고 생각한다. 오래 전의 연애에서 안 좋게 끝이 난 뒤 평소와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평범한 날들이 지나고 뜻하지 않게 교집합의 사람들과 술자리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그중 그녀는 내 표정을 보곤 내가 본인에게 화가 나있다고 생각해서 쉽게 말을 걸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한 그녀는 오히려 나에게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설명해주었고 나는 이에 고마움을 느꼈던 터인지라 이렇게 태어난, 혹은 이렇게 학습한 나의 표정을 용서해달라고 했다. 그림자로 만든 자화상엔 그런 나의 표정이 드러나지 않아 한결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