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외로운 트랙터

 꼬부랑 길을 걷다보니 도로 한 켠에 트랙터가 가지런히 세워져있다. 친구를 만나러 탈탈탈 거리며 타고 왔는지 밭일을 하기 위해 타고 왔는지 알 길이 없다. 중학교 3학년 때 수업시수는 채워야 하고 뭔가 새로운 것을 시키기는 힘들었던 학교에서 근처의 고등학교로 견학을 보낸 적이 있다. 주로 실업계 고등학교에 갔다왔는데 기계공업고등학교에 갔을 때는 각 과별로 자신의 특징적인 것을 해볼 수 있는 코너를 만들었다. 농업고등학교에 갔을 때에는 가을이 휩쓸고 지나간 황량한 텃밭에서 작물을 기르는 기쁨에 대해 말해주었는데 전교에서 1등을 하면 트랙터를 준다고 했다. 그땐 트랙터가 뭐가 대단하냐며 비웃었지만 시골로 여행을 떠날 때 커다란 밀짚모자를 쓴 농부아저씨가 땀을 뻘뻘 흘리며 걷는 나에게 태워준다며 트랙터를 멈출 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탈탈탈 균일한 소리를 들으며 느린 속도지만 꾸준히 앞으로 나가는 와중에 살랑거리는 바람이 땀을 식혀주기도 했다. 이곳 청산도의 길가를 지키고 있는 트랙터는 누구의 것인지 묵묵히 주인을 기다리며 가만히 놓여있었다.

 기다릴 줄 안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은 군대 때문에, 직장 때문에, 시험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기다리게 한다. 기다리는 사람과 기다리게 하는 사람 모두에게 힘든 일이다. 육사 시절 만나던 사람이 있었다. 제법 풋풋한 연애를 하고 있었지만 곧 육사를 그만두고 다시 수험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면서 균열이 생겼다. 떠나가면 붙잡고 내가 떠나가면 붙잡혔지만 관계를 지속할만한 여유가 우리 모두에게 없었다. 시험이 끝난 뒤 후레지아 꽃다발을 들고 찾아가겠노라고 약속했고 마음 먹고 한 해를 보낸 결과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으며 진학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서 축하한다고 연락이 왔고 잠시 머뭇거린 뒤에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했다. 다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체 하며 축하한다고 했다. 마음 속은 전혀 축하할 수 없었지만 그렇게 했다. 입학한 뒤에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찌질한 모습만 보여왔기에 멋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 아껴뒀던 옷을 꺼내입고 머리에 괜히 왁스도 발랐다. 어쩌면 나에게 돌아올 지도 모른다고 마음 속으로 어설프게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에겐 쌀쌀맞게 대했다. 남자친구와의 문제로 힘들어했지만 조금 더 흔들어볼 수도 있었지만 반포에서 잠실까지 걷는 동안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헤어지면서 왁스는 뭐하러 발랐냐며 넌 짧은 머리가 훨씬 어울린다고 했다. 

 그후 우린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마냥 연락하지 않았고 최근 다른 친구로부터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되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게 했든 내가 기다렸든 모든 순간 중에서 단 한순간이라도 조금 더 솔직했다면 지금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같이 걷는 동안 그녀는 혹시 자신 때문에 학교를 그만둔 것은 아니냐고 물어봤다. 사실은 연관이 없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그 때의 난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 때 거짓말을 했노라고 말할 기회는 없을 것이다.